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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견

0.들어가기에 앞서

 한창 공부를 해야 됨에도 독후감 같은 정리글을 쓰는 이유는 첫번째, 이웃집 소음으로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며 두번째, 오늘부터 설명할 20권의 철학서적들은 N. Warburton이 '건방질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고른 '진짜 중요한 20권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결국 본 정리는 내가 심심해서 변덕스럽게 올리는 단발적인 노트가 될 수도 있고, 20권을 모두 정리해서 올려버릴 수도 있다. 다만 단순히 정리본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유는 Philosophy the Classcis을 읽어본 결과 단순한 '사실 전달'만이 아니라 Warburton의 비판 등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내용에 주석을 다는 등 건방진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 정리본은 안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본 노트의 제목에서 과감하게 Philosophy the Classics의 저자 N. Warburton의 이름을 뺏다. 하지만 기본적인 틀은 저자의 책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오해가 없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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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견
진지한 이야기/교육 2011/09/19 13:43

사례. 

임용고시 준비생인 A양은 추석 명절에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하였다. 친척들은 A양을 위로하며 A양에게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이유를 물었다. 어려서부터 교사가 꿈이었던 A양은 어려서부터 학생들과 어울려 문학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친척들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하며 A양의 결혼은 전문직을 가진 사람과 하도록 하며, 나중에는 일을 그만두고 편하게 쉬라는 등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을 들은 A양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부모님과 말다툼을 하였다. 부모는 "너가 잘되라고, 너의 행복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A양은 "그것은 내 행복이 아니다."라고 반박하였다.[각주:1]


A양의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A양의 반응은 지나친 감은 존재한다. 그러나 A양이 왜 반발하며, 우리가 A양의 반발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이것은 사회적 경험이 필연적으로 개인의 경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각 개인의 경험이 모여 형성된 사회적 경험이 개인에게 경험화될 수 있다고 인식한다. 때문에 사회적 경험이 분명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A양처럼 이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감정이 생겨나게된다. 그러나 사회적 경험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중대한 논리적 오류가 존재한다. 따라서 A양의 반발이 단순히 감정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왜 어른들의 경험에 대해 반발을 하는가? (사회적 경험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번째로, 사회적 경험은 종종 귀납적 사실인 경우가 존재한다. 경험적 사실이 가치로 인정받기 위해선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것은 '진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어른의 인생 경험 전체가 진실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어른으로 성장하며 겪은 경험 중에는 분명 필연적으로 결과가 도출되는 것이 존재하며 이것을 '진실'이라고 개념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의 한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에게 경험된 사실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은 어폐가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한 사실들 중 존재하는 '진실'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 경험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대다수의 사람들이 귀납적 사실로써 진실이라고 보기 어려운 특정 경험을 사실로써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예외"가 존재함[각주:2]에도 이를 무시하고 "진실"로 취급한다. 그러므로 세상 일이 원래 그렇다고 하여 위 사례에서 A양이 순진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이성적 사고의 결과인 것이지, 결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두번째로, 패러다임적 사고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 만약 어른의 경험이 '진실'이라면 현실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서 변화 가능성이 전무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실제로 변화하며, 이것을 토마스 쿤의 말을 빌어서 쓰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부를 수 있다. 과학적 사실조차 패러다임의 전환에 따라 진실의 영역에서 사실의 영역으로 벗어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런데 심지어 어른의 경험은 패러다임 내에서, 그것도 자신을 둘러싼 협소한 경험 내에서 발생한 것이다. 성장 과정의 경험이 이러한 패러다임과 경험의 한계성을 벗어날 수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것을 전체 사회로 확대 해석하거나 타인의 의지를 의미가 없다고 단정짓는 것은 심각한 논리적 오류다.


세번째로, 우리가 어른들의 경험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화 되지 않은 지식은 종종 무의식적인 합리적 판단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타인의 경험(본문에선 어른의 경험)이 사실로써 인정되기 위해서는 무의식적인 합리적 판단을 굴복시킬 수 있는 '실체적 경험'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어른의 경험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화 과정을 겪지 않고서는 사실로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험적 사실 없이 이것을 받아드리는 과정 하에서 구성된 '왜곡된 가치관'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으며 나아가 '왜곡된 가치관' 보호를 위해 주변 환경을 가치관에 맞추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어른들은 왜 자신의 경험을 자녀에게 강요를 통해서라도 전달하려 하는가?

 

'어른의 경험'이 단순히 '지배적 사실'을 벗어나 '진실'이라는 가치로 변화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적 욕구 중 하나인 '안전(혹은 안정)에 대한 욕구'와 '자녀애(愛)[각주:3]'가 혼재되어 나타난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자손에게 자신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새로운 경험을 겪게 하는 것을 꺼려한다. 새로운 경험을 겪는 것이 자녀가 안전하지 않은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자식을 '주체'로 보기 보다 자신의 '종속체'로 보는 경향을 강화시켜 종종 주체로써의 자녀와 마찰을 발생시키며 궁극적으로 가족간의 유대를 악화시키는 최악의 결과 또한 발생시킨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경험, 즉 사회적 경험을 인정해서는 안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경험의 전달 방법이다. 반드시 자녀에게 자신의 사회적 경험이 '진실'이 아니라는 전제를 언급하고, 경험을 '참고'하라는 것을 강조하여야 한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부모들은 유교적 가부장적 전통의 결과물로써 집안 어른들의 발언력이 무척 강하다는 점이다. 어른들의 경험은 사회적 경험으로써 가치가 높다. 그러나 특정 윤리적 기준이 옳다고 하여 법으로 강제할 수 없듯이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윤리와 법 관계와 다르게 경험과 사실 관계는 개인의 내제적인 면이기 때문에 본래대로라면 강제할 여지가 더욱 없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경험의 전달 방법에 유의해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지, 이것을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강요, 강제하는 것은 합리적인 인간에게 비합리적 사고를 강요하는 셈이다.

다음은 버트런드 러셀의 발언이다. "세상에 문제가 생기는 근본적 원인은 어리석은 자는 확신에 차있고, 현명한 자들은 의문에 차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해석자하면, "세상은 이런 것이다."라는 말에 무조건적인 의심을 품을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신에 찬 말을 우리가 '진실'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4] 위에서 언급했던 "합리적인 인간에게 비합리적 사고를 강요하다."는 것은 바로 러셀의 말이 의미하고 있는 바이다. 자신의 경험을 '확신'으로 하고 이것을 강요하는 순간, 비판적 사고의 여지를 금지하게 된다. 특정 사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는 것은, 개인의 사고 능력을 제한시키며, 이러한 능력의 제한은 사회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여, 사회를 정체시킬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사회 발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판적 사고를 견지한 자녀에 비해, 경험의 강요를 받아드린 자녀는 사회적 해결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각주:5]

정리하자면, 특정 가치관이 지배적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선 개인의 폭 넓은 경험이 선행될 수 있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를 무시하고 특정 가치관이 '지배적 사실'이기 때문에 '진실'이라 왜곡하는 것은 귀납적 오류일 뿐이다. 이러한 귀납적 오류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이성적 존재로써 무의식적인 결과이다. 때문에 위의 사례처럼 부모, 주변인이 한 개인에게 '행복'이라는 명목 하에 가치관 충돌을 일으키는 발언이 타당하고 건전하다고 인정받기 위해선, 그 발언이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적 사실[각주:6]'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문제 해결 능력과 같은 사회적 능력을 키우고 주체적 인간으로써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에 만연된 사회적 경험론 우선주의를 낮추고 자녀에게 직접적 경험을 유도하는 등의 자세를 키울 필요가 있다.


  1. 9월 19일자 네이버 웹툰 "고시생툰. 23화 누구의 행복"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317365&no=24) [본문으로]
  2. 귀납적 오류 : 귀납적 사실은 개연성이 '높다'고 표기된다. 즉 예외적 사실이 존재하면 귀납적 사실은 개연성이 낮아지게 된다. 가령 독립변수인 p와 종속변수인 q가 존재할 경우, p→q가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p→q가 반드시 옳다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귀납적 사실은 예외가 존재한 순간 필연성이 깨지게 되며, 진실로써의 가치가 상실된다. [본문으로]
  3. 유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자녀애(愛)는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가 위한 도구적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사실 여부는 넘어가더라도 대부분의 부모에게 자녀애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며, 자녀애가 강한 부모일 수록 자녀와의 마찰이 커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본문으로]
  4. 본 내용에선 인용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현명한 자들은 의문에 차있기 때문이다."를 축소 해석하였다. [본문으로]
  5. 교육에서는 이것을 문제 해결의 유연성이 떨어진다고 표현한다. 비판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비판하려는 내용을 카테고리화(개념화)시키는 작업이 선행된다. 비판적 사고를 위해서는 언어적, 수학적 개념을 활용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경험적 사실만을 받아들인 학생들은 암기는 잘하더라도 문제 해결에 유연성(적용)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본문으로]
  6. 보편적 경험적 사실 : 라드부르흐가 주장한 '맹백한 부정의' 개념을 위 내용에 맞도록 변화시킨 개념. 가령, 학살 금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명백한 부정의에 포함된다. 그러나 자기방어(정당방위)를 위한 살인에 대한 내용은 의견이 다양해질 수 있다. 이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 존재라면 보편타당하게 부정의하다고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을 '명백한 부정의'라고 말한다. 위 상황에서 부모의 경험적 발언이 마찰 없이 수긍되기 위해서는, 해당 발언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명백타당한 경험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은 모두 나쁜 사람이다라는 발언이 경험적 사실에 입각해서 나왔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보편적인 경험적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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